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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골굴사(骨窟寺) 역사탐방

미래(mire) 2010. 2. 6. 21:40

    골굴사(骨窟寺) 역사탐방

    경주에서 동해안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약반전산에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 불린다.함월산 석회암 절벽에는 석굴로 여겨지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는데, 맨 꼭대기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높이 4m, 폭 2.2m

    정도의 크기로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세련되지 못한 옷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며,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법당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은 탓에 앞에서 보면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 정도가 심해 비닐하우스

    같은 투명 보호막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법당굴을 비롯한 다른 굴은 그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근엄한

    노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을 모셔 놓았다.

       1.어디로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골굴사(骨窟寺) 역사탐방 다녀와∼

         2.어디서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감은사지(感恩寺址)

       3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304-1 골굴사(骨窟寺)

          4.언제 ☞2010년 2월6일(토욜)

          5.탐방코스☞울산→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감은사지(感恩寺址)→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골굴사(骨窟寺)

        6.누구랑 ☞바우봄날다미(3명) 

경주 감은사지(慶州 感恩寺址)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한국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1959년과 1997년의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층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 당대를 대표하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신라의 금속조각이 성당(盛唐)을 능가하고 있다.

         현재 중문지(中門址),회랑지(回廊址), 남반(南半) 및 금당지(金堂址)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지 북반과 강당지(講堂址)는 민가에 있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로 추측된다.

 

 

 

 

 

 

 

 

☞.경주/감은사지(感恩寺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에는 원형 주좌()가 각출()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과 대석()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다 

.골굴사(骨窟寺)

경주에서 동해안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약반전산에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둔황석굴(窟)이라 불린다.

함월산 석회암 절벽에는 석굴로 여겨지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는데, 맨 꼭대기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높이 4m, 폭 2.2m 정도의 크기로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세련되지 못한 옷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며,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청원 도피안사와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법당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은 탓에 앞에서 보면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 정도가 심해 비닐하우스 같은 투명 보호막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법당굴을 비롯한 다른 굴은 그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근엄한 노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을 모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