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경북궁]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
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광화문은 일제강점
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2013년 2월9일(토욜) 『서울 가족여행』
[광화문 경북궁]
[광화문 경북궁 수문장 교대식]
[광화문 경북궁 수문장 교대식]
[광화문 경북궁 수문장 교대식]
[경북궁]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북궁 근정전]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경북궁 근정전]왕의 즉위나 외국 사신접대 등의 큰 행사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이때 신하들은 마당에 놓여진 품계석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자리.
마당에는 돌을 얇고 네모나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는데, 표면을 약간 거칠게 마무리하여 단조롭지 않고 빛이 반사되어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이 마당에서는 노인들을 격려하는 기로연(耆老宴)이나 과거시험도 치러졌다.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큰 행사 때 사용했던 근정전은 국가와 왕을 표현하는 상징물이었다.때문에 중층으로 꾸미고 기둥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도 4신상과 12지신상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해 놓았다. 정전의 안쪽은 바닥에 전돌을 깔고, 2층까지 높게 트이도록
하였으며, 북쪽 가운데에 임금님의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경북궁 경회루]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경회루는 중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쌓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동·서·남·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년~2005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경북궁]국립민속 박물관
[길]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아무도 먼저가지 않은 길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은 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길
저마다 길이 없는 곳에 태어나 동천 햇살 따라 서천 노을 따라
길 하나 만들고 음음음 음음 돌아간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아무도 대신 가지 못할 길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은 아무도 대신 걷지 못할 길
저마다 굽이 굽이 홀로 넘으며 동천 햇살 따라 서천 노을 따라
길 하나 만들고 음음음 음음 돌아 간다.<범능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