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여행]매화천 길곡리 고향 유리 찾아서
내고향 지켜요.
매화천마을 공부해요.
울진군지에서 옮겨옵니다.
Ⅰ. 길곡리(吉谷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금장산(金藏山) 지맥의 능선이 기성면 이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 동편 능선이 .
영양군과 경계며, 남쪽은 온정면 선구리와 접하고 북쪽은 갈면리와 인접하여 있다.
2. 마을의 역사
1) 삼단(三檀)?사달(沙達)
이 마을은 1400년경에 구씨(具氏), 고씨(高氏), 안씨(安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세사람이 함께 성황당을 모셨으므로 이곳을 삼단(三檀)이라 하였는데 후에 사달(沙達)이라 하였다 한다.
2) 대밭마[竹田洞]
김씨(金氏)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한 뒤에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마을 주위에 대밭이 많다 하여 대밭마[竹田洞]라 하였다고 전한다.
3) 광대골(廣大谷)
광대사(廣大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광대골(廣大谷)이라 전한다.
4) 길마(吉馬)
조선(朝鮮) 초기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선비가 말을 메어두고 용변(用便)을 보고 오니 말이 없어 졌기에 찾아보니
말이 이 마을에 누워있으므로 이곳 마을의 산세(山勢)가 말의 안장과 흡사하다 하여 길마(吉馬)라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안쪽에 있는 마을을 내길마(內吉馬)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외길마(外吉馬)라 하였다고 전한다.
5) 오봉골(五峯谷)
옛날에 오봉사(五峯寺)라는 절이 있었던 골이라 하여 이 골을 오봉골이라 한다. 지금도 절터 흔적이 남아있고 골 입구에 암자(庵子)가 있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51가구 중 경주이씨(慶州李氏) 4, 경주최씨(慶州崔氏) 6, 전주이씨(全州李氏) 4, 김녕김씨(金寧金氏) 4, 김해김씨(金海金氏) 3, 기타 30가구다.
4. 마을의 특징(特徵)
1) 광대골 석탑
광대사가 있었던 절터에 작은 석탑(石塔)이 있었는데 1950년경에 없어졌다. 현재 경주 박물관 뒷마당에 있다.
2) 성황당(城隍堂)
이 마을은 자연부락마다 성황당이 있는데 3개부락에 있는 성황당은 당집이 있고 2개부락은 큰 나무와 큰 바위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내길마에 있는 성황당은 그 마을에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되었고 그외 4곳에 있는 성황당은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목욕제계하고 동리의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특히 광대골 성황당은 상단(上단)과 하단(下단)이 있는데 하단은 보통의 성황제의 예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상단은 제사 때 어물(魚物)을 일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식(佛敎儀式)으로 제사를 올린 것이 전래된 것 같다고 한다.
Ⅱ. 갈면리(葛綿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뒷산 능선을 경계로 기성면 삼산2리와 인접하고 서쪽은 금장산 지맥이 중첩되어 있으며 고초령(高草嶺)가 대령산(大嶺山)이 높이 솟아 있다. 남쪽은 마을 중앙을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갈마점(葛麻店) 윗골에서 길곡리와 경계를 하고 북쪽은 기양리저수지 상부(上部)에서 기양3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갈면리에는 소로실(蘇老室), 갈마점(葛麻店), 잿마[峴村], 솔밭마[松田村], 구석마[隅村], 강변주막거리(江邊酒幕거리), 고초령(高草嶺)이 있다.
1) 소로실(蘇老室)
1574년에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낸 인동인(仁同人) 장귀석(張貴碩)이라는 선비가 선친(先親)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둔하던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新岩里)에서 울진으로 이거(移居)하여 울진입향조(蔚珍入鄕祖)가 되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젊은 사람은 늙지 말고 늙은 사람은 다시 소생(蘇生)한다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소로실이라 하였다 한다.
2) 갈마점(葛麻店)
칡과 삼이 많이 생산되므로 갈마점이라 하며, 장귀석(張貴碩)의 둘째 아들 응복(應福)을 분가시킨 곳이라 전한다.
3) 잿마[峴峙]
높은 산 밑은 낮은 산 비탈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잿마라 한다.
4) 솔밭마(松田)
노송(老松)이 많은 곳에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솔밭마라 전한다.
5) 구석마[隅村]
산모퉁이 구석진 곳에 몇집이 살고 있는데 이곳을 구석마라 한다.
6) 강변(江邊)
냇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이곳을 강변이라 하는데 옛부터 낚시와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7) 주막거리(酒幕거리)
옛부터 영양군 수비면으로 왕래하는 상인들이 고초령 재 밑에 쉬어가는 주막이 있다 하여 주막거리라 한다.
8) 고초령(高草嶺)
1780년경에 초계정씨(草溪鄭氏)인 정교흠(鄭敎欽)공이 자기의 고조부(高祖父)인 수택(洙澤)공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입향(入鄕) 개척하였으며 이어서 남양홍씨(南陽洪氏)가 가세하였다. 전성기에는 10여가구가 성황당(城隍堂)을 모시고 살았으나 지금은 소개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9) 산신터(山神터)
이 골을 대리골이라 하는데 골막바지에 큰 바위가 있어 인동인(仁同人) 장응령(張應齡)이라는 사람이 3년간 신(神)에게 기도한 곳이라 하여 산신터라 전한다.
10) 고초령(高草嶺)의 도적(盜賊)바위
이 령(嶺)은 해발 700m로 울진~영양간의 경계지역이며 30여리가 무인지역(無人地域)으로 도적들이 간혹 나타나 상인들의 금품을 탈취함으로 도적바위라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산령(山嶺)에는 보부상(褓負商)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고 도적들이 나타났던 일화도 있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121가구 중 인동장씨(仁同張氏) 15, 홍천용씨(洪川龍氏) 8, 김녕김씨(金寧金氏) 8, 원주변씨(原州邊氏) 8, 초계정씨(草溪鄭氏) 6, 거제반씨(巨濟潘氏) 6, 강릉최씨(江陵崔氏) 6, 경주이씨(慶州李氏) 4, 삼척김씨(三陟金氏) 4, 영양남씨(英陽南氏) 3, 기타 53가구다.
4. 마을의 특징
이 마을은 갈피(葛皮)와 면(綿), 송이가 많이 나고 농토가 비옥하여 갈면(葛線)이라 하였다고 한다.
1) 창호지(窓戶紙)
갈면리?길곡리?기양리 등지에서 창호지 원료인 저피(楮皮)가 많이 생산되고 냇물이 깨끗하여 질이 좋은 창호지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2) 성황당(城隍堂)
성황당은 소로실과 갈마점에 1개소, 갈면에 1개소가 있는데 당사(堂舍)는 없고 수백년 된 나무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목욕제계하고 동리의 안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그리고 또 이 마을에는 개별적으로 큰 나무나 바위에 지성을 드리는 집도 많다.
Ⅲ. 기양1리(基陽一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매화천을 건너 매화1리이고 서쪽은 소령산(小靈山)지맥인 망방산(望邦山)이 마을 뒷산이며 남쪽은 기양2리, 북쪽은 매화2리다.
2. 마을의 역사
1) 지품(池品)
1658년경에 평산신씨(平山申氏)가 개척하였다 한다. 1650년전에는 이 마을 중앙에 큰 지당(池塘)은 매몰되고 서향(西向)의 맞은편 마을은 유실(流失) 폐허되었다. 폐허된 마을 주민들이 지당이 매몰되어 평지가 된 이 곳으로 이주(移住)하면서 지품(池品)이라 하였다 하며 또 지당 자리에서 우물을 파다가 귀중한 물품이 나왔다 하여 지품이라고 전하고 있다.
2) 영시골(永示谷)
골이 깊고 산이 높아 한발(旱魃)이 심하여도 개울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 영시골(永示谷)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 가구 분포
총 71가구 중 울진장씨(蔚珍張氏) 12, 평해황씨(平海黃氏) 10, 삼척김씨(三陟金氏) 7, 인동장씨(仁同張氏) 5, 남양홍씨(南陽洪氏) 5, 평산신씨(平山申氏) 4, 기타 28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지(城隍堂址)
옛부터 성황신을 모시고 성황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후 1977년에 미신이라 하여 철폐되고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로 변했다.
2) 명당묘지(明堂墓地)
경주 양동이씨(陽洞李氏)가 폐허된 마을에 살 때에 배를 타고 지당(池塘)을 건너가 묘(墓)를 쓰고 경주 양자리(陽子里)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 후손들이 조상묘(祖上墓)를 찾기 위하여 이 마을에 왔으나 마을의 위치가 바뀌어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한다. 이 묘지는 명당자리라 하여 누구든지 음력 8월에 먼저 벌초(伐草)를 하면 1년동안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3) 황성일(黃聖一) 효자비(孝子碑)
하권 제Ⅱ편 제1장 제5절 효행 참조.
Ⅳ. 기양2리(基陽二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북쪽은 신흥리, 서쪽은 소령산(小靈山)의 지맥인 망방산(望邦山) 맥이 뒷산이며 남쪽은 기양3리 북쪽은 기양1리다.
2. 마을의 역사
1) 영양(影良?永陽)
1670년경에 전주이씨(全州李氏)인 태영(泰英)과 인동장씨(仁同張氏)인 중생(重生)이 같이 살면서 연양(軟陽)이라 하다가 마을이 양지 바르고 따뜻하다 하여 영양(永陽)이라 하였다 한다.
2) 옹기점(甕器店)
1600년경에 김씨(金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토질(土質)이 옹기 굽기에 적합하여 옹기를 만들어 생활을 이어갔다 하여 옹기점이라 하였다 한다.
3) 와수골〔瓦水谷〕
이 마을을 개척한 이태영(李泰英)이라는 사람이 이 골에서 기와를 만들었다 하여 와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4) 횟골〔灰谷〕
옛날 이 골에서 회(灰)를 만들었다 하여 횟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5) 곱새뫼등
산등(山嶝) 모양이 곱새등과 같고 이 등에 묘를 쓰면 후손이 곱새가 난다 하여 곱새뫼등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54가구 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9, 인동장씨(仁同張氏) 13, 기타 12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지(城隍堂址)
성황신을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엄선된 제관이 성황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1959년 사라호태풍으로 성황당이 유실된 후 성황제는 폐지되었다.
2) 저수지(貯水池)
1960년대에 와수골 안쪽에 저수지공사가 착공되어 후에 준공되었는데 주위에 많은 굴참나무가 무성하여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저수지에 담수어(淡水魚)가 많아 낚시꾼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지고 있다.
Ⅴ. 기양3리(基陽三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산능선이 덕신2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대령산맥(大靈山脈)이 마을 뒤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갈면리와 인접하고 북쪽은 작은 산과 터밭[基田]을 지나 기양2리가 있다. 그리고 서면 왕피리와 갈면리에서 흐르는 냇물이 합류되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1) 두태〔斗基洞〕
1466년경에 삼척김씨(三陟金氏)인 두만(斗滿)이라는 농부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자기의 이름 두(斗)자를 따서 두기(斗基)라 하였다 하며 1500년경에는 충주지씨(忠州池氏)인 서룡(瑞龍)이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는데 가세하여 지금은 지씨(池氏) 후손이 번창하고 김씨(金氏) 후손은 그렇지 못하다.
2) 터밭〔基田〕
1540년경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두기(斗基)라는 기(基)자를 따서 터밭[基田]이라 하였다 한다.
3) 곰시골(古茂谷)
1620년겨에 울진임씨(蔚珍林氏)가 입주(入住)하여 골이 깊고 옛부터 산림(山林)이 무성하다 하여 곰시골이라 하였다 한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67가구 중 충주지씨(忠州池氏) 18, 울진임씨(蔚珍林氏) 11, 죽산안씨(竹山安氏) 3, 경주이씨(慶州李氏) 4, 남원양씨(南原梁氏) 3, 김해김씨(金海金氏) 3, 기타 25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성황당지(城隍堂址)
성황신을 모시고 엄선된 제관이 동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1959년 사라호태풍으로 유실(流失)되었다.
2) 사명당지(泗溟堂址)
마을뒷산을 넘으면 뾰죽한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에 수백년이 된 작은 소나무가 있는데 이곳에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수도(修道)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은 불공을 드리는 여인(女人)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3) 투장골(投葬谷)
마을 앞의 봉우리에 어떤 사람이 밤에 몰래 묘(墓)를 썼는데 그후로 마을에는 사람, 가축, 재물에 폐가 심하여 못살 지경이 되었다. 이에 동민이 의논하여 그 묘를 이장하고 나니 동리가 평온하였다 한다.
4) 기양저수지(基陽貯水池)
1970년도에 착공하여 1977년에 완공된 저수지로 농경지에 관개(灌漑)를 하고 있으며 또한 경관이 아름답고 담수어(淡水魚)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낚시꾼과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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